♬.Epitaph-King Crimson
Is cracking at the seams. Upon the instruments if death The sunlight brightly gleams. When every man is torn apart With nightmares and with dreams, Will no one lay the laurel wreath As silence drowns the screams.
Between the iron gates of fate, The seeds of time were sown, And watered by the deeds of those Who know and who are known; Knowledge is a deadly friend When no one sets the rules. The fate of all mankind I see Is in the hands of fools.
Confusion will be my epitaph. As I crawl a cracked and broken path If we make it we can all sit back and laugh. But I fear tomorrow I'll be crying, Yes I fear tomorrow I'll be crying.
King Crimson 노래모음
01. Epitaph
02. I talk to the wind
03. Fallen angel
04. Cadence and cascade
05. Walking on air
06. One more red nightmare
07. Moonchild
08.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
09. Ladies of the road
10. Islands
11. The great deceiver
12. Cirkus
King Crimson - Epitaph.(osloskop.net)★
1970년대 한국은 물론 미국에서 킹크림슨의 `묘비명` 노래를
금지시킨 적이 있다.
이 곡은 세계 4대 명곡에 꼽힐 정도인데 노래가 워낙 좋아도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 넣는다라던가....
미국은 기독교 단체들의 항의(그당시만 해도 미국교회의 파워는 대단했답니다.
우리 나라는 멋모르고 미국이 금지한 노래니 따라가고 ㅡ.ㅡ)
또한 이 노래의 포스터니즘적 새로운 철학적 사고방식 자체가
기독교인들에게는
이단적 사고방식으로 비쳐질수도 있겟다라는 생각은 최근에 같게 되었읍니다.
거 이런거 있잖읍니까? 기독교는 항시 새로운 문화현상 자신과 다른것에
대한 색안경끼고 대하는 행동 하루이틀도 아니져
묘비명(에피탑)은 비오는 날, 안개낀 날, 꿀꿀한 날 들으면 정말 삶의 허무,
인생 무상을 느끼면서 자살을 유발시키는 마력이 있다라나 우짜데나
하는 말도 않된 이유가 금지의 이유였던 적이있다. 그 이유을 듣고 너무
어의없서 피식웃고 말아던 기억이든다.
더이상 말하면 많은분들이 느꼈을 충격과 신선한 경험이 저랑 비슷해서
이만 제 사적인 야그는 접고 간단하게(아랫글 보면 간단하게 보이냐 ㅡ.ㅡㅋ)
킹크림슨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읍니다.
King Crimson은?
전설적인 프로그레시브 록 그룹 킹 크림슨
(King Crimson)은 기타와 멜로트론(Mellotron,
컴퓨터로 프로그래밍한 전자 건반 악기)의
명인인 로버트 프립(Robert Fripp)을
중심으로 초기 5년 동안 팝이나 사이키델릭한 감성을 거부하면서 재즈와 클래식을 록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영국의 진보적인 밴드이다.
마이클 길스(Micheal Giles, 드럼·보컬),
피터 길스(Peter Giles, 베이스·보컬),
로버트 프립이 67년 말 결성한 길즈, 길즈
앤 프립(Giles, Giles & Fripp)이라는
트리오로 시작된
이들은 68년 첫 싱글 'One in a Million'을
커트한 뒤 68년 데뷔 앨범 [The Cheerful Instanity of Giles,
Giles & Fripp]을 발표하지만 앨범은 실패로 돌아가고
결국 트리오는 해체된다. 69년 초 마이클과 로버트는 이안 맥도날드(Ian McDonald, 보컬·기타),
그렉 레이크(Gregg Lake, 보컬·베이스)를 영입해 새로운 밴드를 구성하고,
객원 작사가 피터 신필드(Peter Sinfield)의 곡 'Court of the Crimson King'
에서 팀 이름을 따 현재의 킹 크림슨을 결성한다.
69년 7월 런던의 하이드 파크(Hyde Park)에서 열린 자선공연에 롤링 스톤즈(Rolling Stones)와 함께 출연, 65만 명 관중 앞에서의 연주로 명성을 얻게
된이들은 곧 데뷔 앨범 [In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을 발표한다. 타이틀곡인 'Court of Crimson King'은 평론가들의 찬사를 받으며 프로
그레시브 록에 있어 가장 도전적인 곡으로 평가받았으며, 동시에 대중들을
사로잡아 UK 5위, US 28위를 차지한다. 하지만 이들은 공교롭게도 앨범이 한창 성공가도를 달리는 시기에 해체
국면에 이르게 된다. 이안과 마이클은 지속되는 공연에 따른 스트레스와
음악적 방향에
대한 불만으로 그룹을 탈퇴했고, 그레그 또한 로버트, 피터와 트리오로 발매한
두 번째 앨범 [In the Wake of Poseidon](70)을 끝으로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Emerson,Lake & Palmer)를 결성하기 위해 그룹을 떠난다.
이후 킹 크림슨은 프립을 중심으로 새로 영입된
고든 해스켈(Gordon Haskell, 보컬·베이스), 멜 콜린즈(Mel Collins, 색소폰), 앤디 맥쿨로(Andy McCullough,
드럼)와 함께 작업을 지속해 [Lizard](71)를 발표했다. 그러나 다시 고든과 앤디가 탈퇴하고, 바즈 버렐(Boz Burrell, 보컬)과
이안 월러스(Ian Wallace, 드럼)가 가담해 [Islands](72)를 발표한다.
하지만 절대 안정세를 타지 못하는 이 불운한 그룹 킹 크림슨은
미국 순회공연에 이어 또 다시 붕괴되고 만다.
표면적으로 킹 크림슨의 역사는 끝난 것처럼 보였지만, 로버트는 다시
이전 예스(Yes)의 드러머였던 빌 브루포드(Bill Bruford), 그룹 페밀리(Family)에서 베이스와 보컬을 맡았던 존 웨튼(John Wetton), 바이올린과
멜로트론을 연주하는 데이비드 크로스(David Cross), 퍼커션의 제이미 무어(Jamie Muir), 작사가 리차드 팜 제임스(Richard Palme-James)로 새로운
라인업을 구성하여 킹 크림슨의 역작으로 평가되는
[Larks' Tongue in Aspic]을 발표, UK 차트 20위에 오르는 쾌거를 거둔다. 그러나 74년 [Starless and Bible Black] 발표 이후 킹 크림슨은
다시 균열되어 로버트, 존, 빌의 트리오로 축소된 채 이전 멤버 멜과
이안의 도움으로[Red](74)를 완성한다. 결국 유일한 원년 멤버인 로버트는
그해 9월공식적인 밴드 해체를 선언했다. 이후 멤버들은 각자 그룹을 결성해 활동했고, 로버트 또한 자신의
솔로 앨범인 [Exposure](79)를 발표했다.
81년 로버트는 빌, 베이시스트인 토니 레빈(Tony Levin),
기타리스트이자 보컬리스트인 아드리안 벨류(Adrian Belew)와 함께
디서플린(Discipline)을 결성했다. 다시 킹 크림슨으로 밴드 이름을 바꾼 후 이전 킹 크림슨보다 훨씬 창의적이고 야심만만한 음악으로 그룹의 부활을 시도했다. 94년 다시 로버트, 아드리안, 트레이 건(Trey Gunn, stick/backing vocals), 토니, 빌, 팻 매스텔로토
(Pat mastelotto, acoustic/electric percussion)로 재정비된 킹 크림슨은
95년 [Thrak]를 발표했고, 현재까지 끊임없는 순회공연을 통해
가장 바람 잘 날이 없었으면서도 끈질긴 밴드의 생명력으로 오래도록
장수하는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의 전형이 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