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가수별)/M
Mireille Mathieu / La Dernière Valse The last waltz
by "조우"
2012. 1. 4.
"La Derniere Valse (The last waltz) / Mireille Mathieu"
La Derniere Valse ..
Le bal allait bientot se terminer
Devais-je m'en aller ou bien rester?
L'orchestre allait jouer le tout dernier morceau
Quand je t'ai vu passer pres de moi...
C'etait la derniere valse
Mon cœur n'etait plus sans amour
Ensemble cette valse,
Nous l'avons dansee pour toujours.
on s'est aime longtemps toujours plus fort
Nos joies nos peines avaient le meme accord
Et puis un jour j'ai vu changer tes yeux
Tu as brise mon cœur en disant "adieu".
C'etait la derniere valse
Mon cœur restait seul sans amour
Et pourtant cette valse, aurait pu durer toujours
Ainsi va la vie, tout est bien fini
Il me reste une valse et mes larmes...
La la la la la la la la la la
C'etait la derniere valse
Mon cœur restait seul sans amour
Et pourtant cette valse, aurait pu durer toujours
La la la la la la la la la la
무도회가 곧 끝나 가네요.
내가 떠나야만 하나요.
아니면 이대로 머물러야 하나요?
오케스트라는 마지막 곡을 연주하고 있었지요.
내 옆을 지나치던 당신을 보았을 때
마지막 왈츠 곡이었죠
내 마음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어요
이 왈츠 곡에 맞춰
우리는 계속 춤을 추었지요.
오랫동안 아주 뜨거운 사랑을 나누고 있어요
우리의 기쁨과 고통이 하나가 되어갑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당신의 눈빛이
달라졌음을 알게 되었죠
당신은 안녕이라 말하며 내 마음에 상처를 남겼지요
마지막 왈츠 곡이었죠
내 마음은 사랑이 떠나버린 채 외로이 남겨져 있지요
마지막 왈츠 곡은 언제까지 계속 흘러 나오겠지요
그렇게 삶은 흘러가고 모든 것이 잘 끝을 맺겠지요
나에게는 한 곡의 왈츠와 눈물만이 남은 채
마지막 왈츠 곡이었죠
내 마음은 사랑이 떠나버린 채 외로이 남겨져 있지요
그래도 이 왈츠 곡은 언제까지 계속 흘러 나오겠지요
새처럼 노래하는 '아비뇽(Avignon)의 참새'
'미레이유 마띠유(Mireille Mathieu)'는
1946년 7월22일 프랑스 남동부 아비뇽(Avignon)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가난한 집 14명의 형제자매 중 맏딸로 태어나 마치 현대판 신데렐라처럼
동화같은 삶을 살았다.
그녀의 아버지 Roger씨는 비석공이었는데 그의 수입으로는 생활에 어려움이 많아
식구들이 모두 나가 함께 열심히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살던 집은 물이
새는 등 어려움이 뒤따랐다.
그녀의 재능은 어렸을때 부터 알려져 그녀가 처음으로 무대에 출연한 것은
4살때 성당의 자정미사때였다.
어릴 적 그녀의 꿈은 같은 프랑스 국적 31년 연배인
'에디뜨 삐아프(Edith Piaf, 1915.12.19 ~1963.10.11)'처럼 유명한 가수가
되는 것이었다.
정말 그녀의 꿈처럼 처음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을 땐
'에디뜨 삐아프'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음색과 창법이 비슷했다.
학교에서 그녀는 'Edith Piaf' 의 'La Vie En Rose(장미빛 인생)'을 불렀다.
학교를 다니던 도중 그녀는 Laure Colliere라는 선생에게 발탁되어 가수가
되는 길과 인격체 형성 등의 도움을 받게된다.
이는 그녀를 정신적 육체적으로 강한 여성으로 만들었고, 노력없이 얻을수 없다는
집념으로 노래에 전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15세때 아비뇽의 샹송 콘테스트에서 우승을 하여, 버클레이 레코드의 사장
에디 버 클레이에게 스카웃되었다.
그녀가 19살때인 1965년 12월 ..
프랑스 국영 TV방송국은 1963년에 세상을 떠난
에디뜨 삐아프의 대를 이을 가수를 발굴하는 신인무대 성격의 프로그램으로
텔레 디망쉬(Tele Dimanche)라는 아마츄어 샹송 콘테스트를 열고 있었다.
이 프로그램의 최종결승에서 19살 작은 체구의 '미레이유 마띠유'는
'에디뜨 삐아프'의 명곡 'L’Hymne A L’amour(사랑의 찬가)'를 불러서 우승을
차지하였다.
매스컴에서는 그녀의 노래를 듣고 2년전에 세상을 떠난 '에디뜨 삐아프'가 다시
탄생했다고 머리기사로 대서특필했다.
그리고 그 당시 프랑스에서 가장 인기있었던 가수
'조니 할리데이(Jean-Philippe Smet, 1943년 ~ )'의 매니저 Johnny Stark가
마침 그 프로를 보고 있었는데 미레이유 마띠유와 바로 계약을 맺고 4주만에 그녀를
모든 샹송 가수들의 꿈인 올랑피아극장 무대에 서게하였고, 그는 죽기전까지
그녀곁에 함께 하였다.
그녀는 다음 해 1966년 봄에 데뷔하였고 "사랑의 신조"가 히트하면서 스타가 되었다.
폴 모리아가 작곡한 데뷔곡 'Mon Credo(나의 신조)' 란 그녀의 샹송모음집이
170만장의 판매고를 올렸던 것이다.
그녀는 하루 사이에 애수에 젖은 깊은 아름다운 목소리의 주인공으로 가수로서
성공의 길을 걷게 된다.
이로인해 '미레이유 마띠유'는 프랑스의 노래하는 대사의 역할을 하게되며
그녀는 모든 팬들을 위해 자신의 노력을 아끼지 않는 최고의 가수로 성장한다.
그녀는 불어 ,독어, 영어,이태리어,스페인어,러시아어 핀란드어, 중국어 등
9개국 언어로 1200 여곡을 불렀는데, 그의 공연은 Tom Jones 등 세계적인 가수가
따라다녔고, 40년이 넘는 기간동안 1억5천만장이상의 판매고 기록도 남겼다.
미레이유 마띠유(Mireille Mathieu)의 초기 음악은 에디뜨 삐아프(Edith Piaf)와
같은 샹송이었지만, 70년대 이후 음악은 샹송과 팝을 섞어놓은 프렌치 팝의 형태로
바뀌었다.
프랑스에서는 '미레이유 마띠유(Mireille Mathieu)'를
'샹퇴뢰즈 아 브와(Chanteureuse A Voix)'라고 부르는데 아름다운 목소리를
들려주는게 목적인 가수라는 뜻이라고 하더군요.
이렇게 불리우는 가수들은 마이크가 필요없을 정도로 강한 오페라적인 발성을 하는
공통점이 있는데 '루이스 마리아노(Luis Mariano)'와 '에디뜨 삐아프(Edith Piaf)'가
들었던 그 호칭을 '미레이유 마띠유'가 이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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