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청암 박태준 (金豊三. 2011.11.30 12.1일자 특집.대구일보)
청암(靑巖) 박태준(朴泰俊)은 1927년 경남 통영군 장안면 임량리 갯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6살 때 어머니를 따라 일본에서 건설회사 토목기술자로 일하는 아버지에게 가서 일본와세다 대학 기계공학부 2학년까지 다니다가 1948년 해방을 맞은 조국으로 돌아왔다.
조국에 돌아온 젊은 공학도 박태준은 장차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조국이 다시는 나라를 잃는 불행을 격지 않으려면 나라를 지키는 군인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1948년 그는 남조선 경비 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전신) 6기생으로 입교 소위로 임관하여 육군소장으로 전역 할 때까지 15년간 군인의 길을 걸었다.
그는 초급장교 육군중위 때 6.25를 맞아 서울미아리 전쟁터에서 사흘간 배고픔 과 한기로 떨면서 밀려오는 인민군 탱크를 필사적으로 막았다. 탱크에 뛰어올라 뚜껑을 열고 수류탄을 투척하는 육탄 병사들과 함께 싸웠다. 그때 국군들은 탱크 앞에 장렬한 죽음 뿐 이였다. 이 전투에서 연대병력 2500명중 150여명이 겨우 살았다.
그 후 그는 6.25때 가장 치열한 격전지 낙동강 전선 안강전투에 참전하여 몇 번이고 위험한 고비를 넘기면서 중대병력을 이끌고 싸웠다. 그는 북진을 거듭하여 흥남 함흥 을 거쳐 청진까지 진격 하였다. 그는 조국이 위태로 울 때 군인 이였다.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
(하나) 그가 육군25사단 참모장 시절이다. 늦가을 김장철이 되었다. 창고에 고춧가루가 산더미 같이 쌓였는데 매콤한 고춧가루 냄새가 나지 않았다.
그는 양동이에 물을 떠오게 하여 고춧가루 한줌을 넣었더니 순식간에 양동이 물이 벌겋게 물들었다. 손을 넣어 젖어보니 손에 잡히는 것이 있었다. 꺼내보니 톱밥 이였다. 그는 상기된 표정으로 병참장교를 한참 노려보다 물에 젖은 톱밥가루를 그의 가슴에 확 뿌렸다. 그리고 곧바로 사병식당으로 갔다. 식사하는 병사들을 유심히 보니 모두 김치를 먹지 않았다. 그가 한 병사에게 “왜 김치를 먹지 않느냐 ”고 물었다. 머뭇머뭇 하던 병사가 일어나서
“우리식당의 김치는 맵지가 않습니다 맛도 없고 먹고 나면 소화가 잘 안 됩니다” 박태준은 화가 머리까지 치밀어 올라왔다. 사단장에게 보고했다. 사단장은 “그 까짓것 가지고 흥분 하느냐”는 식의 반응이다. 잠시 후 육군본부 높은 상급자로 부터 전화가 왔다. “납품업자는 교체하지 말고 진짜고춧가루를 납품하는 조건으로 마무리 하라” 고 했다.
퇴근 후 그의 숙소로 납품업자가 찾아왔다. 두툼한 봉투를 내밀면서 비굴한 웃음을 흘렸다. 그는 “야 이 새끼야 이 더러운 돈 가지고 당장 꺼져 쏴 죽이기 전에” 버럭 고함지르자 납품업자는 혼비백산하고 달아났다.
며칠 후 납품업자를 바꿔 진짜고춧가루를 실은 트럭이 부대로 들어오자 마침 연병장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병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트럭에서 매콤한 고춧가루 냄새가 풍겼기 때문이다. 다음날 1군 참모장 박정희 소장으로부터 격려 전화가 왔다.
(둘) 첫아이가 급성폐렴에 걸려 열이 40도를 오르내렸다. 그때는 통행금지가 있을 때라 밤중에 꼼짝할 수가 없었다. 젊은 새댁은 내심 군부대 자동차라도 이용했으면 하는 바람 이였지만 평소 그는 사적으로 부대차를 쓸 수 없다는 생각이 확고했다. 부부가 통행금지가 해제될 때 까지 초초하게 기다리다가 아기는 안타깝게도 숨을 거두고 말았다.
(셋) 김영삼 대통령후보선대위원장을 끝내 맡지 않았던 그는 대통령선거가 끝난 후 92년12월 망명 아닌 망명길 동경으로 날아갔다. 마중 나온 일본수상 다케시다는 “일본경시청과 정보실에서 샅샅이 조사해 봤는데 일본기업들과 그토록 많은 거래를 했는데 어떻게 개인적인 일본예금통장 하나가 없느냐” 고하면서 “이것은 결백이 아니라 어리석음 입니다” 라 고 했다.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서 포철 세무조사를 이 잡듯이 뒤졌지만 “포철 비자금은 없었다”고 국세청 대구지방청장이 공식적으로 확인했다. 그는 김영삼 정부 때 일본에서 13평 아파트에 5년간 불편하게 살았지만 행복했다고 한다.
(넷) 1977년8월1일. 포항제철 발전송풍설비 공사현장. 기존 콘크리트 구조물 공정 80% 진척됐고 70미터 굴뚝이 올라가고 있었다. 이 공사에서 불실시공을 찾아낸 그는 건설현장 책임자. 외국인 기술 감독. 임직원이 보는 앞에서 이 건물을 폭파 시켜 버렸다. 그리고 그는 폭파소리 못지않게 큰 소리로
“부실공사가 훗날 대형 참사를 가져 온다 포철사전에는 부실공사는 없다”라고 강조했다. 이 폭파사건은 미국 하버드. 스텐포드 대학 MIT교재에 실렸다.
전남광양제철소 영 호남 균형발전 도모
(다섯) 1980년 10월 28일. 입법회의 제1경제위원장실. 포스코 제2 제철공장 부지 결정을 위한 회의가 열렸다. 정부 관계자는 충남 아산만이 적임지라고 보고 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참석자들에게 다른 의견을 물었지만 아무도 아산만 에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박태준은
“아산만은 지하 암반이 45도로 기울어져 파일을 안정시키기가 어렵고 간만의 차이가 10미터가 되어 대형선박이 접안 하자면 15만 톤 도크를 건설해야 하므로 부적당 하다. 그러나 광양만은 지반이 열악하지만 일본의 모래말뚝공법으로 해결 할 수 있으니 광양만으로 결정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했다.
그때 전두환 대통령은
“ 나는 철은 잘 몰라도 안보는 좀 압니다. 태안반도는 휴전선과 가까운 편이며 ......현재남북관계로 볼 때 아산만에 중요한 국가기간산업을 건설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제2제철소는 포철의 판단을 존중하고 국가안보를 고려하여 광양만으로 결정 합시다”
이날 그가 전남광양만으로 주장한 또 다른 이유는 영. 호남의 균형 있는 경제발전을 염두에 둔 깊은 뜻이 담겨있었다고 생각된다. 흔히 정치인들이 대선 때 단골메뉴로 등장하는 영.호남 갈등 해소를 박태준은 이미 오래전 몸소 실천한 것이다.
특히 그는 어느 날 “이북에도 제철공장 하나쯤 세우면 남북이 함께 잘 살수 있을테데..”라고 하면서 아쉬워한 바 있다.
박 정희 와 만남.
그가 남조선 경비 사관학교 6기생 생도시절 박정희 대위는 깐깐한 탄도학 교관 이였다. 어느 날 탄도궤적 계산법 문제를 칠판에 적어놓고 이를 풀 생도는 손들라고 했다. 탄도궤적 계산법은 기하학 미분 삼각함수 등 각종 수학 원리가 포함되어 있어 매우 어렵다. 아무도 나서지 않자 박정희 교관은 박태준 생도를 지명했다. 박태준은 일본 와세다 대학 공학부를 다닌바 있어 어려운 수학문제를 술술 잘 풀었다. 그때 박정희는 박태준을 눈 여겨 봤다. 고춧가루 사건 때 박정희 소장의 격려전화가 이를 잘 뒷받침 하고 있다.
이렇게 만난 두 사람은 서로 인간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30년간 국가발전의 힘든 파고(波高)를 함께 넘었던 것이다.
1960년 박태준이 국방부 인사과장을 맡았다. 장교들의 진급을 좌우하는 육군의 요직이다. 금품 유혹과 권력의 압력에 시달려야 했다. 남들은 돈방석에 앉았다고 하지만 그는 남의 집 문간방에 셋방살이 하는 육군대령 이였다.
그는 그 자리를 버리고 박정희를 따라 부산군수기지사령부 인사참모로 내려갔다. 그곳도 군납업자들이 득실거렸지만 박정희와 박태준은 월급날만 되면 두 사람이 부산 광활리 횟집에서 소주잔을 기우렸다고 한다. 박정희와 박태준이 얼마나 청렴했던가를 여기서도 묻어 나온다.
어느 날 그는 “그 어른(박정희) 구미 촌사람이 돼서 언제 회를 먹어 봐서 야지. 회 참 무척 좋아하셨지. 그 어른 생각만 하면 자꾸 눈물이 나오려 한다”고 하면서 박정희를 회고 하며 그리워했다.
1961년5월18일. 혁명소식을 듣고 그는 국가최고회의 박정희를 찾아갔다. 이날 박정희는 그를 혁명동지 명단에서 제외한 이유를 차분하게 설명했다.
“혁명이 실패하면 임자라도 살아남아 군을 이끌어 나가는 지도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며, 내가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이 세상을 떠나면 자네에게 내 처자를 돌봐달라고 부탁하기 위함 이였네. 오늘부터 나의 비서실장이 되어 혁명을 완수하세“ 라고 했다.
1967년11월8일. 박정희는 박태준에게 포항종합제철공장 추진위원장을 맡기면서 “나는 임자를 잘 알아 이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야 어떤 고통을 당하여도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자기 몸을 희생 할 수 있는 인물만이 이 일을 할 수 있어. 아무소리 하지 말고 맡게. 자네는 포항제철을 맡고 고속도로는 내가 맡겠네” 박정희는 박태준을 누구보다 신뢰한 것이다.
박태준 총리사임 후 대북지원 시작
육군소장으로 전역한 그가 남의 집 셋방살이를 한다는 소식을 들은 박정희는 1964년 새해첫날 그를 청와대로 불러 작은 집 이라도 마련하라고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그는 박 대통령의 하사금과 살고 있는 집 전세금을 뽑아 겨우 서대문 북아현동에 작은 단독주택을 마련했다.
그가 국무총리 시절 정부가 엄청난 돈을 북쪽에 지원하려고 하자 그는 국민의 세금이므로 국회결의를 받든가 아니면 최소한 정당대표 간담회를 통하여 양해를 얻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대중 대통령 가신 권모 박모 씨 들은 노골적으로 그를 못 마땅하게 생각했다.
2000년 5월19일. 불손한 정치세력이 그가 부동산에 투자한 것처럼 헛소문을 내자 그들의 속셈을 안 박태준은 곧바로 국무총리직을 사임했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의 하사금으로 구입하여 36년간 살면서 정들었던 북아현동 집을 팔아 전액 사회 환원했다. 이는 강직한 그의 성품 때문이다.
그가 국무총리를 사임하던 날. 아침까지 맑았던 하늘이 갑자기 검은 구름이 몰려와서 천둥번개를 치면서 소낙비가 광화문 아스팔트를 심하게 내리 쳤다.
흔히 하늘도 무심치 않다는 말을 이날 필자는 실감나게 느껴졌다. 김대중 정부의 대북지원은 그가 국무총리 사임 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노 사 함께하는 복지실현
그는 평소 “기업은 곧 사람이다” 라 고 강조하면서 사람을 귀하게 여겼다.
대한중석 사장 때 지하 1500미터 막장까지 내려가서 광부들의 근로실태와 안전을 챙겼다. 막장까지 내려간 사장은 그가 처음 이였다. 사원주택은 일제 때 지은 헛간 수준의 다락집에 빈대가 득실거렸다. 그는 낡은 사원주택을 헐고 신축하는 한편 광부들의 꾸준한 처우개선과 근무조건향상으로 만성적자였던 국영기업체를 1년 만에 흑자로 전환시켰다.
포항제철 또한 공장건설에 앞서 사원주택을 먼저 짓고 생산 못지않게 교육과 훈련에 힘썼다. 그는 단기적 임금인상보다 후생복지와 자녀교육 지원으로 직원들의 장기적 생활수준 향상에 힘써왔다. 포항 광양 종합제철소는 지금도 노.경 협의회에서 노.사 간 충분한 소통으로 생산성을 높이고 있다.
교육보국(敎育報國)의 실천
1980년 가을 그는 보험회사로부터 리베이트 6천만원을 받았다. 이 돈은 회사 수입으로 잡을 수 없는 그야말로 공돈이고 사장개인이 써도 되는 돈이다. 그러나 그는 곰곰이 생각한 끝에 청와대 박 대통령을 찾아갔다.
“나라를 위해 쓰시라고 기부금 좀 가져 왔읍니다”하고 6천만원 수표가 든 봉투를 내밀었다.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그는 공돈의 성격을 설명했다. 이야기를 듣고 난 대통령은
“임자는 앞으로 할 일이 태산이야 가져가서 필요할 때 써” 탁자 위 봉투를 도로 박태준에게 내밀었다.
봉투를 돌려받고 포항으로 내려오는 승용차 안에서 이 돈을 어디에 쓸 것인지 생각하다가 문득 장학재단 설립 생각이 났다. 그때 그 돈이 오늘의 세계적인 포스텍 설립의 종자돈이 된 것이다.
그 후 포항과 광양에 사원자녀를 위한 유치원4개 초등5개교 중학 2개교 고등학교 3개를 설립하여 그가 평소 주장한 교육보국을 실천한 것이다.
특히 세계적 공과대학설립을 위해 미국15개 영국 4개 독일2개 프랑스 1개 대학 등 세계유명대학에 재직 중 인 한국인 교수부부 450명을 만나 교수초빙 설명을 했다. 이 같은 노력 끝에 기계 전자 재료 산업공학 부분과 물리학 화학분야에서 저명한 교수를 포스텍 으로 초빙 할 수 있었다.
야심차게 출발한 포스텍 은 첫해 신입생을 뽑는데 문교부에 전기모집을 요구했다. 문교부 관계자는 신설대학에서 전기모집은 가당찮다고 하면서 평범한 대학으로 후기 모집 하라고 권했다.
이 소식을 보고받은 그는 “세계적 연구중심대학. 소수정예의 이공계 인재양성을 하자면 전기 모집해야 한다. 지원학생이 없으면 당분간 교수연구중심대학으로 간다. 학력고사성적 280점 이상학생을 모집하여 우수한 학생을 더욱 우수하게 가르치겠다“고 했다.
그의 뜻대로 1987년 전기 신입생 모집에서 9개학과 249명 모집에 학력고사 300점 이상학생 94명을 포함 543명이 지원했다. 이렇게 출발한 포스택은 개교 25년 만에 지금 세계적인 대학이 되었다.
교원정년 당초계획 60세를 62세로
국민의 정부 때 당시 이해찬 교육부 장관이 고령교사 한사람 퇴직하면 젊은 교사 3사람을 채용 할 수 있다고 선전하면서 교원정년을 65세에서 60세로 낮추겠다고 했다. 당시 그는 자민련 총재였다. 자민련과 국민회의가 공동정부를 구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통령과 매주 정기주례회동을 열어 IMF를 벗어나기 위한 국정운영을 함께 했다.
1998년11월21일 대통령과 주례회동에서 그는 “교원의 정년이 갑자기 5년이 단축되면 초 중등교사 부족현상이 일어나기 때문에 교원정년을 당초 정부안 60세에서 63세로 하고 점진적으로 시행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그의 제안을 받아 교원정년을 62세로 조정 결정하였던 것이다.
이날 한국교총 전국회원들은 여의도 한강부지에 모여 교원정년단축 반대 집회를 열고 있었다 당시 김민하(金玟河 )교총회장은
“박태준 자민련 총재의 제안으로 교원정년이 당초 60세에서 62세로 확정되었다”고 하자 참석했던 교총회원 2000여명은 “박태준” 을 연호 했고 자민련 총재실에는 전국교원들의 감사 전화와 전문이 쏟아져 들어 왔다.
국내 외 저명인사들이 말하는 박태준
(하나) 삼성의 고 이병철(李秉喆) 회장이 포항제철을 방문하여 포철재무구조를 보고 놀랐다. 50%수준의 부채비율은 사기업에서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날 이후부터 이병철 회장은 그를 눈 여겨 봤다.
그러던 1980년 초 이병철은 당시 삼성중공업이 적자였기 때문에 연간300억씩 5년간 지원하는 조건으로 개인 박태준에게 이를 넘겨주겠다고 했다.
이 제안을 들은 박태준은
“너무 과분한 선물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아직은 저의 일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국가의 일을 맡아 중도에 그만 둘 수 없지 않겠읍니까”
이 말 을 들은 이병철은 “ 박 사장 다운 대답이고 아름다운 대답이야”라고 했다. 그때 이병철은 중공업 경영의 적임자는 박태준으로 봤고 그의 제안은 포철을 물러난 후 박태준의 남은 인생을 염려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병철은 1987년 임종을 기다리는 병실에서 비서에게 구술을 받아 적게 했다. “박태준은 군인의 기(氣)와 기업인의 혼(魂)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부하에게 완벽. 결백. 철저를 요구하는 무섭고 엄격하지만 내심은 인정이 많은 사람이다”고 했다. 이 말은 이병철 경영의 살아있는 교재에 기록되어 있다.
프랑스 미테랑 전 수상
(둘) 프랑스가 외국인에게 주는 최고의 훈장 “레종 도뇌르 코망되르”를 그에게 수여하면서 미태랑 수상은
“한국이 군대를 필요 했을 때 귀하는 장교로 투신했습니다. 한국이 현대경제를 위해 기업인을 찾았을 때 귀하께서는 기업인이 되었습니다. 한국이 미래의 비젼을 필요할 때 귀하는 정치인이 되었습니다. 한국에 봉사하고 또 봉사 하는 것. 그것이 귀하의 삶에는 끊임없는 지상명령이 였읍니다” 라고 했다.
(셋) 신일본제철 이나야마 회장은 중국 덩샤오핑이 포철 같은 제철소를 중국에도 지어 달라고 요청하자 “제철소는 돈으로 짓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짓는데 중국에 박태준 같은 인물이 없어 포철 같은 제철소를 지을 수가 없읍니다”라고 했다. 듣고 있던 덩샤오핑은 잠시생각에 잠겼다가 “그럼 박태준을 수입하면 되겠다”고 했다. 덩샤오핑 사망 후 중국정부는 2003년 중국국무원 중국발전연구회 고문으로 박태준을 초빙하였다
(넷) 소설 태백산맥 작가 조정래는 김구 신채호 한용운 안중근 박태준을 소재로 5권의 위인전을 출판하였다. 기자들이 “어떻게 살아있는 인물을 위인전에 담을 수 있느냐”고 묻자 그는 서슴지 않고 “그것은 박태준이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했다.
포항종합제철 4반세기 마무리
1992년 10월3일 박태준은 동작동 국립묘지 박정희 대통령 무덤 앞에 서서 미리 준비한 두루마리를 펼쳤다.
“각하 포항 광양 양대 제철소 연간 조강 2천100만 톤 체제완공을 끝으로 4반세기에 걸친 대장정을 마무리 하였습니다” 하고 말문을 연 그는 치밀어 오른 감정을 억누르는 듯 그의 목소리는 떨렸고 그의 눈시울은 붉어졌다.
간혹 민주화 세력들이 박정희시대를 폄하할 때 그는 “산업화 과정을 독재의 사슬로 기억한다면 빈곤의 사슬도 기억하라”고 충고 했다.
오는 12월 2일 포스텍 노벨동산에 선생의 조각상이 제막된다. 본인은 극구 사양했지만 포스텍 총동창회 교수 총학생회 포스코 노.경 협의회가 중심이 되어 추진된 것이다.
청암 선생의 조각상 건립추진이 지역사회 알려지자 포항청년회의소 포항예총 포항시장상인회 등 20여개 시민단체 대표들이 모여 동참을 결정했고 포항시민 2만1천973명이 자율적으로 참여 성금이 7억5천500만원이 모였다고 한다. 특히 전남광양에서 익명의 시민2명이 “포항시민 훌륭한 일 한다”고 하면서 1천300만원을 기탁했다고 한다. 모처럼 우리사회 훈훈한 모습을 본다.
조각상은 세계적인 조각가 중국남경대학 교수이며 중국정부 산하 중국조각원장 우웨이산(吳爲山)이 맡았다. 그도 세계철강 왕 박태준의 조각상 작품을 제작하게 돼서 매우 큰 영광이라고 말 했다.
필자가 13여 년간 청암 선생을 가까이서 보고 듣고 느낀 그의 사상과 철학. 그리고 작가 이대환의 “실록 박태준 평전”을 참고 하여 그의 삶 일부를 여기에 담았다. 박태준의 사상은 한마디로 “ 청렴과 강직”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의 훌륭한 뜻이 교과서에 실어 후세까지 전해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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