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제 1 독서에서
회개한 바오로 사도는
주님의 예루살렘 공동체와 어울리기 위해
기웃거리지만 제자들은 바오로를 영 못미더워 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극렬하게 주님의 공동체를
파괴하려고 한 그였으니 말입니다.
사실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해도
사람이란 못미더운 존재이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누군가를 믿는 것은
그가 대단히 믿을만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을 믿는 믿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믿음으로 믿는다는 것은
인간은 뛰어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이라는 그런 믿음입니다.
이 말은 인간이 유한하다는 뜻이지만 더 풀이하면
아무리 하느님을 벗어나려 해도
인간은 도무지 하느님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진리 안에서 벗어날 자 없고,
하느님의 사랑 떠나서 살 수 있는 자 없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망나니처럼 제 멋대로 살던 사람도,
아무리 안하무인격으로 교만하게 살던 사람도
진리와 사랑에로 돌아오게끔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그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바르나바는 제자들을 설득합니다.
사울이 제 스스로 주님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를 데려오신 것이고 담대히 설교하게 하셨다고.
그것은 부모의 사랑과 비교하여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아무리 제 멋대로 사는 사람이고 그래서
복음의 탕자처럼 부모도 싫다고 떠난 사람일지라도
부모는 그를 끝까지 자식으로 여기며 기다립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부모의 사랑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군대를 가 있어도 거기에 부모의 사랑이 있습니다.
감옥에 가 있어도 거기에 부모의 사랑이 있습니다.
외국 저 멀리 나가 있어도 거기에 부모의 사랑이 있습니다.
자식이 있는 곳이라면
지옥까지라도 따라가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과의 사랑도 바오로 사도 얘기하듯
우리의 사랑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를 하느님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는 것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단지 우리가 그 사랑 안에 머물기만 하면 되는데
어떤 사람은 그 사랑이 고루하다고 새 사랑을 찾아 떠나고
어떤 사람은 그 사랑이 지겹다고 다른 사랑을 찾아 떠나며
어떤 사람은 그 사랑이 필요 없다고 무시할 수는 있습니다.
그 결과는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지 않아 말라 버리듯
서서히 병이 들고 죽어갈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 없이도 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하느님의 진리를 벗어나서도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은 세월이 지나봐야 알 것입니다.
어제는 오랜만에 중고등부 아이들과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하느님, 친구, 부모 중에
누구에게서 힘을 얻어 살아가는지 물었더니
친구와 부모에게서 힘을 얻어 살아간다고 모두 대답을 하였고
하느님에게서 힘을 얻는다는 친구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들도 언젠가는
자기들이 하느님 안에 머물러야 하고
하느님에게서 힘을 얻어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에게서 힘을 얻는다고 대답한 친구는 하나도 없었지만
이것만은 모두 잘 알고 있었습니다.
포도나무의 가지처럼 하느님에게 붙어 있고
하느님에게서 힘을 얻는 것이 기도라는 것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무얼 쭝얼쭝얼 대는 것이 기도가 아니라
하느님 사랑의 물줄기에서
물을 긷는 것, 그것이 기도입니다.
- 김찬선(레오나르도)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