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바오로 사도는 전에 베드로 사도가 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긴 설교를 유다인들에게 합니다.
예수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인데
사람들이 그분을 죽게 했지만
하느님께서 그분을 다시 살리셨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면서 시편 제 2편을 인용합니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여기서 내 아들은 누구이고,
오늘은 언제입니까?
여기서의 아들은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 하늘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할 때의
그 예수 그리스도이시겠지요?
그런데 그 예수 그리스도는
벌써 마리아에게서 태어났고
이미 돌아가셨는데 바오로 사도가 설교할 때
오늘 낳았다는 시편을 인용하니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돌아가신 분이 부활하셨음을 얘기하며
오늘 낳았다고 하는 것이니
돌아가신 분이 오늘 우리에게
다시 나셨다는 뜻이 아닐까요?
역사의 예수는 한 번 돌아가셨지만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모든 세대의 모든 사람에게
“오늘” 다시 태어나신다는 뜻일 겁니다.
이 뜻을 가만 생각하고,
깊이 생각해보면 이런 뜻이겠습니다.
하느님은 당신 아들 그리스도를
마리아를 통해 태어나게 하신 것처럼
영적으로 매일 우리에게 낳아주십니다.
그 주님을 우리가 죽이지만 않으면
주님은 매일 태어나시는 거지요.
그간 우리는 그 주님을 태어나지 못하게
매일 태중 살해해왔는데
“오늘” 우리는 그 주님을 죽이지 않아 그래서
주님은 드디어 “오늘” 태어나신 겁니다.
수 천, 수 만 번 살해되신 다음
“오늘” 정말 귀하게 다시 태어나신 겁니다.
헌데 제가 어찌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냐 하면
제가 그제 손자 하나를 또 얻었기 때문입니다.
제 형과 누나들의 조카들이 결혼을 하여
저한테 손자를 안겨주는데
이번이 열 네 번 째 손자입니다.
아이를 낳고 바로 제 조카딸이 전화로 소식을 알리고
조카사위는 그 아이와 산모 사진을 찍어 보내주었는데
얼마나 제 조카딸과 사위 놈이
신기해하고 좋아하고 기뻐하는지
조카딸은 그렇다 치고 사위 놈이
목소리까지 떨면서 감동을 전하는데
생명의 대단함,
생명이 태어나는 것의 그 경이로움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끔직한데
그 생명이 태어나는 것을 내가 막는다면,
태어나기 전에 내가 그 명줄을 끊는다면
이 얼마나 끔직한 일입니까?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늘” 내게 태어나신다는 것은
삶 안에서 내가 수없이 죽인 주님을
하느님께서 되살리신 것이고,
“오늘”은 하느님께서 되살리신
그 주님을 더 이상 내가 죽이지 않고
제 조카딸처럼 기꺼이 받아 안는 것입니다.
그동안 저는 참으로 수없이 주님을 살해했습니다.
의도적으로 살해하기야 했겠습니까?
그런데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수없이 살해했을 겁니다.
다른 데 신경 쓰느라,
생명에 민감하지 못해서
태어남의 징후를 감지하지 못해서 그랬겠지요.
그러나 오늘만은 달라야겠습니다.
수없이 오늘을 맞이했지만
오늘의 오늘은 다른 날의 오늘과는 달리
주님께서 나에게 태어나는
그 오늘이어야겠습니다.
- 김찬선(레오나르도)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