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하고 싶은 일
이희라
이곳 캘거리의 겨울은 해마다 긴장감으로 살아 있었다. 굉장한 눈은 온 도시를 뒤덮었고
매서운 추위와 날카로운 바람은 요란한 소리로 나뭇가지를 흔들어대며 우리를 떨게했다.
그것 또한 이곳 겨울이 주는 매력이었는데 그렇게 변함없이 반복될 거라 믿었던 겨울이
어찌된 일인지 올해는 온화한 햇살 아래에서 낯선 모습으로 서성이며 앓고 있다. 어쩌면
또 다른 방향으로의 전환점이 될 수 있는 생의 분기점에서 나도 겨울처럼 앓고 있었다.
한글학교 아이들에게 읽힐 만한 한국책들을 찾으러 아들 방에 들어갔다가 동화작가 정채
봉님의 책을 발견하고 집어들었다. 행복한 이야기들을 엮은 책이었는데 머리글의 제목이
'당신한테만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였다. 정채봉님이 나한테만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자, 시작할까요? 당신한테만 묻겠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당신의 그 일이 행복합니까? '
지금은 고인이 된 정채봉님이 그 특유의 맑은 눈빛과 함께 나직하게 속삭이듯이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그 뒤에도 글들이 계속 이어졌지만 그 첫 문장에서 내 시선은 멈춰졌다.
지난 해 9월 둘째인 아들마저 누나가 다니는 타도시 소재의 대학에 입학하게 되면서 집을
떠나갔다. 두 아이가 떠난 텅 빈듯한 집에 남겨진 나는 갑자기 주어진 많은 시간에 당황했다.
뒤돌아보면 그 동안 참으로 바쁘게 살아왔었다. 장손의 맏며느리로, 한 남자의 아내로, 아이
들의 어머니로, 직장인으로 살면서 무엇 하나 뚜렷이 내놓을 것은 없지만 앞만 보고 부지런
히도 걸어왔다.
아직 독립시킨 것은 아니지만 눈 앞에 있던 자식들에게서 놓여나게 되니 나는 누구인가,
앞으로의 삶은 어떻게 꾸려가야 하나, 여러 가지 생각들이 꼬리를 이었다. 나 자신을 찾는
길을 향해 첫발을 떼어 놓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바빠졌다. 아이들이 크게 방해했던
것도 아닌데 그동안 멀리했던 영어 테이프와 교재들을 모두 꺼내서 정리하고 여기저기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지난 9월부터 시작한 일이 한글학교 교사, 문인
협회 회원, 영어 학교 다니는 일. 그리고 계속 해오던 인터넷 블로그의 적극적인 관리였다.
그런데 그 모든 일들이 나를 힘들게 하고 있었다. 한 주를, 한 달을, 반 년을 거슬러 맞닥뜨린
내 삶의 무질서함과 준비 부족 때문이었을까. 삶의 열정이며 행복을 위함이라고 이름 붙였던
것들이 '이건 아니다' 라는 생각과 함께 어느 일을 그만둘 것인가 하루에도 수없이 갈등을 했다.
그 동안 얼마나 내 능력 밖에의 일을 만들어 가면서 시간을 보냈는지 지난 몇 개월이 몇 년
도 더 지나간 느낌이다. 이곳 교민 아이들의 모국어 능력에 관한 현실도 짐작했던 내 생각과
많이 달랐으며 문인협회에 제출해야하는 글쓰기에도 수련이 덜 돼 글빚에 시달리고 있었다.
영어 공부라는 것은 부단한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고, 내 개인의 자료 창고로 시작한 인터넷
블로그(미니홈피)는 이민일기가 곁들여지는 바람에 이민을 준비하는 많은 사람들이 내 블로그
를 찾아왔고 능력에도 없는 상담자 역할까지 해야만 했다. 좋은 음악과 그림, 좋은 글들을 찾아
서 올리다 보니 또 많은 사람들이 내 블로그를 통해서 위안을 받고 하루를 시작한다
고들 했다. 심리 치료사라도 된 양 그들을 위해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울 것같은 글과 음
악을 찾아 헤매고 다녔다.
가만히 잠시 쉬고 있을 때 조차 쫓기는 기분이 들어 숨이 가빴다. 그 옛날 임신과 출산, 육
아와 함께 직장 생활을 하면서 대가족인 시댁에서 바쁘게 살았을 때보다 오히려 더 바쁘게
느껴졌다. 그 때는 간간이 쉬는 시간도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조금도 쉬는 시간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천히 걸어가도 될 길을 왜 이리 조바심을 내며 달리고 있는 것일까.
마음 속으로 미래를 위해서 살았노라고 위안도 해보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기쁨으로
달았던 날개는 점점 힘을 잃어 가고 있었다. 누구에 의해서도 아닌데 지난 몇 달 내가 걸어
온 자리는 늘 불편했던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일, 나만을 위해 써야지 했던 부분은 아직 첫
장을 열지도 못했는데도 말이다.
오늘은 반갑게도 이곳의 겨울답게 제법 많은 눈이 내렸다. 매서운 추위와 함께 세찬 바람
소리도 들려왔다. 모두가 잠든 깊은 밤, 책상 앞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얼
굴을 드니 낯익은 얼굴이 나를 들여다 보고 있었다. 창밖 나뭇가지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달
이다. 저 높은 곳에 둥실 떠 있는 찬연한 달. 그 희디흰 커다란 달이 나를 한가득 감싸 안고
있었다. 정다운 이가 말없이 보고 있는 듯이, 알 수 없는 넉넉함이 따스하게 파고 들었다.
오랜 갈등 끝에 화해를 청하는 사람의 손길이 이렇게 푸근할까. 휘영청 밝은 저 달은 나에게
무슨 메시지를 보내오고 있는 걸까. 정채봉님의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이 행복합니까?'
라는 부드러운 목소리도 함께 들려온다. 달빛에 투영된 긴 긴 날의 여정이 엊그제 일처럼 풀려
나고 있었다. 어린 날부터 사춘기를 겪던 10대, 그리고 40대에 이르기까지의 굵직굵직한 일들
이 선명하게 내 앞에 모습들을 나타내고 있다.
내가 젊었을 땐 사십이 넘은 아주머니들을 보면서 저 사람들은 대체 무슨 희망으로 살아갈
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내가 벌써 그 아주머니가 되어 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반드시 슬픈 일만은 아니다. 그것은 늙어가고 위축되어 가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완숙에의 길로 가는 것이라 생각해 본다. 젊었던 날들을 '여자'로서만 살아온
나는 이제 한 '인간'으로서 일어서야만 한다.
자신만의 가치를 발견하는 것은 남들로부터 찬사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순수하게 기쁨을
느끼기 위해서인 것 만큼, 세상에는 골인 지점이 없는 싸움과 취미도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어제보다 새로운 오늘, 지난 순간보다 더욱 새롭게 다가오는 순간을 소중하게 맞이해야겠다.
삶이 흘러가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쓸쓸한 일이지만, 잡을 수 없이 흘러가는 생이기에 다가오는
모든 순간이 더욱더 새롭고 소중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면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은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니고 내가 원해서, 좋아서 하는
일들이었다. 하고 싶어도 여건이 허락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앞으로 좀더
준비하고 최선을 다한다면 이 일들은 나에게 큰 보람과 기쁨을 안겨다 줄 것이라 믿는다.
앞으로도 계속 하고 싶은 일을 하나 정한다면 글을 쓰는 일이다. 글을 쓰는 일은 세상을 깊이
사랑하며 하루 하루의 삶을 깊은 사색과 함께 살아가게 해줄 수 있는 좋은 방법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글을 쓰며 지혜를 찾고 싶다. 삶이 버거울수록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길인지,
글쓰기를 통해 스스로 묻고 확인하고 치유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일일까.
이런 나를 위해서 정채봉님은 속삭이는 목소리로 나를 일깨워 주었나 보다.
'이 세상은 행복하기 위하여 있다고......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사랑할 때 행복이 찾아온다고......'
S.E.N.S / Like Wind(바람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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