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마음
이 희 라
제법 가랑잎이 떨어진다. 떨어져 누운 낙엽에 한 해를 마감하는 우수가 묻어 있다. 얼마 전에 사다놓은 거실의 국화 분들이 가을을 한 움큼 집안에 들여놓았다. 문득 국화가 생을 잘 다듬어 온 나이든 여인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안팎으로 곱게 영글어 있는 중년의 여인을 그려보는 것이 즐겁다.
일흔이 다 되어 노벨 문학상을 받은 어느 시인의 시 마지막 부분이다.
쉰 살에 실수가 잦고, / 예순에 담석증을 앓고,
/ 일흔에 우리는 우리를 더 이상 우리라 고 부를 수 없게 되었다.
/ 나의 아내도 이미 세상을 뜨고 없으니.
질병, 그리고 이별, 이것이 인생인지 모른다. 어차피 인생은 시작도 끝도 혼자이다.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수 없는 외로운 노년.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숙명의 길이다. 요즘 사람들이 술잔을 부딪치며 나누는 덕담이 있다. ‘이대로!’ 30대도 60대도 모두 이대로 머물고 싶은 것이다. 얼마나 소박하고 눈물겨운 소망인가. 노년을 외롭지 않게 잘 보내기 위한 준비에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애완견 기르기'를 꼭 추천하고 싶다.
늦은 밤,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면 반갑게 맞이하는 애견 로빈. 삼 년 전 한국에 잠깐 다녀와 보니 공항에 웬 낯선 녀석이 가족과 함께 나와 있었다. 한 달이 갓 지난 강아지. 남편과 아들이 내가 집에 없는 동안 데려다 놓은 녀석이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귀엽다고 난리인데도 그 녀석 키울 걱정이 앞서 반갑게 안아주지 못했다. 처음에는 집안이 더러워지고 일이 많아져서 당황했다. 그러나 녀석이 온 가족의 공통 관심사로 대화의 장을 만들어주고 기쁨을 주는 데에 크게 놀랐다. 충성을 다하니 내가 무척 소중한 사람이 된 듯했다. 공부하러 타 도시로 떠난 아이들의 빈자리를 가득 채워주었고 기쁨을 주었다. 그러잖아도 이곳의 단조로운생활에 좀처럼 웃을 일이 없었는데.
시부모님께서 우리 나이에 손자를 보셨으니 우리 부부도 손자를 볼 나이다. 손자가 있다면 이렇게 예쁠까? 아닌 게 아니라 남편이 로빈에게 장난감과 간식을 사주고 놀아주는 모습은 시아버님이 손주들에게 하셨던 것과 똑같다. 가만히 둘러보니 우리 동네에 애완견이 없는 집이 거의 없다. 캐나다는 사람보다 개가 더 많다는 말이 맞나 보다.
노인의 삶을 가치 있게 해주는 힘은 손자, 손녀와의 관계라고 하는데 핵가족화에 따른 가족 구성의 변화가 더 이상 가족 간의 유대를 지속시켜 주지 못하고 있다. 애완동물이 노인에게 있어 손자·손녀와 유사한 역할을 해준다고 한다. 이민 생활에서 노인들의 외로운 사정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 가게일로 바쁜 우리 부부는 혼자 집에 계시는 시어머님을 걱정했는데 다행히 손자에게처럼 양육할 기회를 다시 얻으셨다. 먹이와 간식 주기. 털 손질 등, 소일거리를 갖게 되신 것이다. 하루에도 수없이 뒷마당에 드나드는 녀석의 문 열어주기도 바쁘시다. 심심할 틈이 없으시다는 어머님의 밝은 목소리와 뒷마당에서 텃밭을 가꾸실 때 어머님 옆에서 평화롭게 놀고 있는 로빈의 모습이 우리를 기쁘게 한다. 혼자 계실 때는 창문의 블라인드를 다 닫아놓으셨던 어머니께서 덩치 큰 로빈 덕분에 든든하다고 하신다. 아침마다 어머님을 모시고 로빈과 산책하는 남편, 로빈이 없다면 아마 매일 어머니를 모시고 산책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로빈 안부로 아이들이 전화를 더 자주하니 우리는 로빈을 '효자 로빈'이라고 부른다.
한밤중 이층 계단 끝 복도에서 자고 있는 로빈이 깰까 봐 불을 켜지 않고 어둠 속에서 조심조심 올라갔는데 지나가라고 얼른 자리를 내준다. 발바닥에 전해지는 바닥의 온기가 내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로빈을 통해서도 따뜻한 마음을 배운다. 남을 위한 배려와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 따뜻한 마음, 주변에 우울함보다는 기쁨을 퍼뜨리는 밝은 마음을 갖고 싶다. 겨울이 오면 햇살은 더욱 깊숙이 들어와 우리를 춥지 않게, 외롭지 않게 해 줄 것이다. 그리고 가을이 머물다 간 쓸쓸한 뜰도 토닥거려 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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