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과 향수병
/이희라
이민 생활 9년을 넘어오는 동안 씩씩하게 잘 살아온 것 같은데 요즘은 왜 이리 서글퍼지는지요. 조금 전에 한국에 있는 시누와 통화를 했는데 많은 시댁 형제들이 모여서 식사를 같이 했다는 말을 들으니 부러웠습니다. 향수병, 저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말인 줄 알았습니다. 친정 쪽으로나 시댁에서 명절 때가 아니어도 많은 친척들의 왕래로 늘 바쁘게 살았던 저는 외로움과는 거리가 멀었고 오히려 조용히 살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바쁘게 살았던 그 때가 그립군요.
요즘 따뜻해진 날씨에 곧 봄이 오려나 하고 기대했었는데 갑자기 강한 눈보라가 치면서 순식간에 많은 눈이 쌓였네요. 한국은 지금 많은 봄꽃들이 앞을 다투어 피고 있다고 하던데......
지난 달 한국 방문 때 동생의 시어머니께서 해주신 봄동 겉절이와 열무김치, 봄나물 무침들, 음식 솜씨 좋은 큰언니의 흑산도 홍어무침, 버섯전골, 집에서 만든 청국장, 더덕구이. 둘째 언니가 묵은 총각김치를 푹 고아서 끓여 준 된장찌개가 눈앞에 어른거립니다.
밤늦게까지 일하는 저희 부부는 가게에서 인터넷으로 한국 TV를 보는데 남편은 '잘 먹고 잘 사는 법' '6시 내 고향' '맛 기행 맛 자랑' 등 향토 음식과 관련된 프로를 보고 나면 "우리 한국에 가서 살자" 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 나서부터는 제가 가게에 들어설 때 남편이 "6시 내 고향"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싸해집니다.
아이들은 제가 만들어준 음식이 곧 고향의 맛이 되겠지만 시어머님과 남편은 이게 아닌데 하면서 점점 더 어린 시절의 음식을 그리워하는 것 같습니다. 그제 토론토에서 공부하는 딸이 전화로 한국 마켓에 갔더니 쑥이 있어서 너무 반가워 얼른 사가지고 왔다면서 어떻게 해먹을까 하고 묻더군요. 제일 하기 쉬운 쑥국을 해보라고 했습니다.
이민 생활이 오래 됐어도 갈수록 식탁은 더욱 한국적이 됩니다. 이곳에서는 여자들의 음식 솜씨에 따라서 가족들의 행불행이 나눠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국처럼 다양한 식당과 천연 음식 재료들이 없으니...... 요즘은 전보다 한국 마켓에 다양한 한국 식품들이 들어오지만 나이를 먹어갈수록 식구들(저도 포함) 입맛이 까다로워지고 점점 더 고향의 맛이 절절해지는 것이 문제지요.
외국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항상 안고 살아갑니다. 외국에서 생각하는 고향이란 곧 한국이자 어머니이며 또 음식에 대한 향수입니다. 노천명의〈고향〉이라는 시가 생각나는군요.
언젠들 가리 /마지막엔 돌아가리/
목화꽃이 고운 내 고향으로 /
조밥이 맛있는 내 본향으로.
고향에서 먹은 깔깔한 조밥마저도 맛이 있었다고 기억하며 그리워하는 마음은 고향을 떠나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했을 것입니다. 고향이란 글자만 보아도 어머니가 떠오르고, 어머니의 손맛이 담긴 음식이 생각납니다.
추억의 향이 흘러나옵니다. 고향집 산모롱이가 아스라하게 보입니다. 하늘거리는 아카시아 이파리에 저녁노을이 물결처럼 부서질 때, 모롱이를 돌아서면 자반고등어 굽는 냄새가 바람을 타고 옵니다.
교민신문 시앤드림에 올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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