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생각 / 이희라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어릴 때 학교에서 어머니와 함께 앞에 나가서 노래 부를 기회가 종종 있었는데 어머니께서는 늘 '오빠 생각'을 부르자고 하셨다. 아버지와 함께 하는 부부동반 모임에서도 꼭 이 노래를 부르셨다고 했다.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갑자기 쓰러져 돌아가신 당신의 큰오빠 생각이 나셨던 것일까.
어머니마저 돌아가셔서 이제 내게는 부모님이 안 계신다. 탈상 때까지 친정집을 그대로 둔다고 해서 전화를 걸어보면 여전히 신호가 가고 있다. 아무도 받지 않아 허전하고 슬픈 마음을 달래며 그동안 잊고 있었던 큰오빠 생일을 확인해서 달력에 표시해 놓았다.
오빠에 대한 추억은 왜 이리도 많은 지…….
큰오빠를 대장으로 해서 손잡고 서커스나 영화를 보러갔던 일. 장래 희망란에 판검사라고 쓰라고 해서 우리를 난처하게 했던 일. 무릎 꿇고 동생들과 함께 성적표를 보여주던 일. 천정, 벽. 방문 여기저기에 오빠가 붙여놓았던 영어문장들은 눈이 부셨고 오빠 책상 서랍 안은 늘 깔끔해서 볼펜대에 끼워놓은 몽당연필까지도 멋지게 보였던 일. 카메라를 빌려와서 동생들 사진을 자주 찍어주었는데 그날은 언니들이 동생들과 나를 예쁘게 꾸며줘서 더욱 신이 났었다.
초등학교 때 교육대학을 견학하고 그 규모와 시설에 감탄해서 오빠에게 편지를 보냈더니 곧바로 답장이 날아왔다. 오빠가 다니는 대학을 소개하며 그림까지 그려서 쓴 편지였다. 동생에게 꿈과 용기를 심어주려던 오빠의 마음을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다. 추억 보따리를 풀어 놓으니 끝이 없다.
그런데, 그런데 오늘은 오빠에 대한 아픈 기억이 자꾸만 앞을 가린다.
식사 준비를 하고 있는데 아들이 들어와서 음식을 접시에 담아서 날라주더니 사용했던 스푼을 무심코 들고 가서 앉는다. 대학생 아들과 그 손에 들린 커다란 스푼. 문득 어렸을 때 대학생이었던 큰오빠와 숟가락이 떠올랐다.
"그 스푼을 보니까 네 큰외삼촌 숟가락이 생각난다. 모양도 비슷하고 그렇게 컸었는데."
방학 때인가. 큰 양푼에 어머니께서 밥을 비벼주시면 모두들 한꺼번에 숟가락을 들고 달려들어 먹었다. 숟가락을 든 채 동생들이 먹는 것을 보고만 있던 오빠. 내가 덜 먹으면 오빠가 조금 더 먹게 될 것 같아서 양보를 했는데 결국은 개구쟁이 둘째오빠만 신나게 했었다.
어머니가 막내를 임신해서 만삭이셨고 맏이인 큰오빠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지셨다. 죽음의 문턱까지 가셨다고 했다 일곱 살이었던 나는 의사와 낯선 사람들이 다녀가는 것을 나무 울타리 담장 사이로 숨죽이며 지켜봤다. 뒷마당으로 난 방문을 열고 토하시는 아버지 모습을 보는 날이 계속되었다. 공무원인 아버지의 월급으로 생활하다가 수입이 딱 끊어졌다. 막내를 출산하고도 일곱 명의 어린 자식들과 누워 있는 남편을 챙기느라 몸을 채 추스르지 못한 어머니는 돼지, 염소, 닭을 들여놓고 동네 공터에 고추, 깨, 콩 등 밭농사를 시작하셨다. 어머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살림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대학에 합격한 오빠는 어머니에게 대학 입학금만 도와주면 어떻게 해서라도 혼자 힘으로 공부를 하겠다고 했다.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는 어느 여름날 방학을 해서 내려온 오빠를 버스가 다니는 큰길에서 만났다. 유난히 하얀 얼굴의 오빠가 활짝 웃는데 커다란 눈이 퀭했다. 강렬한 햇빛에 금방 부서질 것 같이 버석거리던 얼굴. 순간 어린 내 눈에도 오빠가 영양실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 큰오빠가 대학교에서 받은 장학금을 어머니께 내놓으며 '동생들 수업료부터 먼저 해결 하세요' 하는 것이 아닌가. 오빠가 고등학교 때 수업료를 못 내서 수업시간에 쫓겨 왔었다는 사실을 어른이 되어서야 알았는데 어린 고등학생 오빠가 겪었을 슬픔과 동생들을 위하는 마음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그때부터 나는 오빠의 영양 상태를 꾸준히 살폈고 뭔가 맛있는 것이 생기면 늘 오빠에게 주고 싶었다.
이민 오기 며칠 전 오빠는 동생들 가족을 모두 초대했다. 그날도 오빠는 이것저것 올케 언니를 도우면서 맛있는 음식들을 챙겨 주었는데 오빠가 먹는 모습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내가 맛있다고 하니까 '그래. 어서 많이 먹어'라고 했었다. 떠나기 전 인사를 할 때 흘렸던 오빠의 눈물이 떠오른다. 요즘 세상에 이민 간다고 우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웃어주었다.
지난봄에 한국에 갔을 때 오빠가 나를 보더니 ‘너도 이제 늙었구나’ 했다.
세상의 모든 큰오빠들, 아니 한국의 장남들, 그것도 가난한 집안의 장남들은 죄를 짓지 않고도 늘 책임감으로 어깨가 무겁다. 부모와 동생들과 아내에게 죄인처럼 살아간다. 장남의 사전에는 '변명'이란 단어가 없는 것인가. 우리들 역시 친정에 무슨 일이 있으면 큰오빠부터 찾았다. 그러면 오빠는 어디에서도 부랴부랴 달려왔다.
내 남편을 포함해서 큰 형부, 시누 남편, 막내 동생의 남편, 그러고 보니 주변에 장남이 참 많다. 그들 역시 큰오빠 못지않게 사연이 많을 것이다. 특히 이곳 교민 장남들의 사연을 들어보면 대부분 부모님과 동생들 걱정이다. 어린 날 마음껏 개구쟁이로 살아 보지 못했을 장남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그 대신 성실함과 진실 됨으로 사회에서 모두들 성공하지 않았을까. 겪어보지 않고서는 얻지 못하는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된 것도 어떻게 보면 큰 복일 지도 모른다고 위로해 주고 싶다. 그 깨달음을 바탕으로 누군가에게 희망을 주고 누군가에게 용기와 지혜와 따뜻함을 주는 사람이 바로 장남들이라고. 이제 시대가 변해서 장남이라는 단어가 아마 사전에서 없어질지도 모르겠다. 앞으로는 장남만 힘든 세상이 더 이상 아니기를 바라면서 한편으로는 책임감과 성실함의 대표인 그들이 없는 사회가 은근히 걱정 된다.
부모님이 그립고 나이 듦에 대한 의기소침으로 우울해질 때 부모님을 대신해 줄 큰오빠가 있어서 든든하다. 마침 오늘이 오빠 환갑이어서 한국에 축하 전화를 했다. 생일인데도 출근해 있는 오빠가 무언가 직원들에게 지시하는 소리가 들린다. 큰오빠가 가난에서 벗어난 지도 오래 되었고 음식 솜씨가 좋은 아내가 있는데도 내가 제일 자신 있게 잘 만드는 음식으로 오빠를 대접하고 싶다. 그래서 오빠가 배부르게 그리고 행복하게 먹는 모습을 보고 싶다.
- 교민 신문에 올린 글입니다 -
오빠생각 - 이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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