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그릇 예찬
/ 이희라
오늘은 또 뭘 해 먹지? 이렇게 어마어마한 숙제가 또 있을까? 젊은 날 직장일로 시간에 쫓기면서도 시댁
어른들의 식사준비까지 재빨리 해내던 그 순발력은 다 어디로 갔는지……. 사십 전에 며느리를 보신 친정
할머니는 그때부터 부엌일에서 손을 떼셨다는데 요즘 여인들은 몸을 움직일 수 있는 한 밥상 차리기를
계속해야할 것 같다.
어느 글에서 아픈 여인이 단 한 번이라도 자기 손으로 가족에게 음식을 차려주는 게 소원이라고 했던 것,
만들어서 먹일 가족이 있음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 때 거리가 없었던 가난한 시절의 어머니를 생각하는 것
등으로 위안을 해보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다. 자기 전에 늘 다음 날 해먹을 음식 메뉴를 미리 정해 놓지 않
으면 잠을 못 자는 습관이 생겼다. 음식 숙제에서 벗어난다면 내 인생은 어떻게 달라질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누가 취미를 물으면 요리라고 대답할 정도로 음식 만들기를 즐겼었는데…….
오늘은 오랜만에 남편이 빈 그릇을 내민다. 이것저것 잘 먹어줘서 반찬 그릇들도 비어 있다. 반가운 빈 그릇.
그 전에 시어른들과 아이들은 어떤 음식이든지 맛있게 먹고 그릇들을 싹싹 비워 주었었다. 요 근래에는 식탁
위에서 빈 그릇을 보기가 어렵다. 음식을 아무리 조금씩 해도 늘 남는 것이다. 요즘 밥상 차리기가 신이 나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구나.
부엌 창고를 정리하다보니 라면 상자에 라면이 그대로 있었다. 아이들이 방학을 해서 집에 올 때쯤이면 늘
라면을 사다 놓았는데. 지난 방학 때에도 먹지 않아서 유통기한이 지나 버렸었다. 이번에도 또 그래야 할 것
같다. 이제는 건강상의 이유로 아이들까지 멀리하게 된 라면. 얼마 전 슈퍼마켓에서 삼양라면이 눈에 띄어서
무척 반가웠다. 잊지 못할 추억의 삼양라면. 1960년대 초 가난한 서민들을 위해서 라면이 등장했다지만 내
어릴 때는 그것도 마음껏 먹을 수 없었다. 저녁으로 국수를 자주 먹었는데 두 어린 동생들은 라면, 나는 라면
반 국수 반, 바로 위의 오빠는 국수에 라면 국물을, 그 위의 언니 오빠들은 모두 국수였으니까…….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어느 날 점심시간에 어머니께서 도시락을 가지고 오셨다. 복도를 지나가던 아이 편으로
전해 받은 도시락이 유난히 뜨거워서 조심스럽게 수건을 풀고 열어보니 라면이었다. 같이 따라온 열무김치
까지 뜨끈했다. 교실 복도 쪽 창문을 보니 어머니께서 지켜보고 계셨다. 얼른 웃어드렸다. 그날 쌀이 없어서
도시락을 못 싸셨는데 중고등학생인 큰 애들은 어쩔 수 없었고 약해 빠진 셋째 딸을 위해 부랴부랴 라면을
구해서 끓여 오신 것이다. 그때의 일을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잊지 못하고 있다.
지난 봄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그 이야기를 꺼냈더니 어머니도 기억난다고 하셨다.
어릴 때는 밥상 위에 반찬이나 밥이 남는다는 것을 상상도 못했다. 어머니는 자식들이 남길 정도로 배불리
먹게 해주고 싶으셨을 텐데 너무 빨리 비워지는 그릇들 때문에 마음 아프셨을 것이다. 그 시절에 비하면
요즘은 많이 풍요로워졌다. 그렇다고 해서 밥상 차리기가 더 쉬워졌을까. 돼지고기를 꺼내놓고 시어머니는
비지찌개, 남편은 고추장 양념 불고기, 아이들은 카레나 김치찌개로 결정한 다음 일을 시작한다. 식구가 줄
었는데 일은 더 많아진 것이다. 가난한 시절의 어머니들은 아이들 키우기가 훨씬 수월했을 수도 있겠다.
뭐든지 생기는 것에 그저 감사하고 어머니가 주는 대로 받을 줄 알았으니까.
우리 인생에서 먹는 일만큼 중요하고 즐거운 일이 또 있을까. 음식을 준비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잘 먹어
줘서 빈 그릇이 많이 나오면 반갑다. 비어 있다는 의미만큼 쓸쓸한 것이 없지만 빈 밥그릇만큼은 통쾌하다.
몸이 건강하고 마음이 편해야 잘 먹는 것이니 가족의 건강을 잘 살피는 것이 우선이리라. 우리들은 누구나
행복하길 원한다. 행복이 미래에 있다고 생각하고 언젠가 행복해질 거라고 상상한다. 푸른 하늘, 초록빛
세상, 사랑하는 사람들이 지금 여기 있는데 말이다.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밥이란 이처럼 절체절명의
생명 양식인 것을…….배부르게 먹고 살게 되었다고 그 고마움을 잊고 음식을 만드는 번거로움과 시간
소비를 따지며 잠시나마 푸념했음이 부끄럽다.
교민 신문 (시앤드림)에 올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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