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편지 / 이희라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던 어머니
사지의 문턱에서 가까스로 깨어나신 날부터
두문불출 글을 쓰시더니
위암 판정을 받고 다시 누우셨다
위와 식도까지 잘라낸 후에도
텅 빈 배를 움켜잡고 다시 펜을 잡으신 어머니
글을 쓰시는 시간엔 고통이 덜하다는 구실로
식구들이 말려도 막무가내였다
오랜 항암치료 때문에 생긴 골다공증으로
손가락이 여러 번 부러져도
부서질 것 같은 허리를 담요로 받치고
침침한 눈을 비벼대며 글을 쓰시던 어머니
급기야 대장까지 전이된 암 덩어리
10분을 똑바로 앉아계실 수 없는데
야윈 가슴에 진통제 패치를 붙이고
쓰는 시간을 무섭게 늘려가셨다
어머니 손을 마지막 잡아드리던 날
눅눅한 베갯머리 곁엔너덜너덜해진 성경책과
열일곱 권 노트가 놓여 있었다
창조주의 사랑의 편지인 성경전서를
호흡이 멈추는 날까지 읽으시며
자식을 위해 간절한 기도로 필사해 놓은 편지였다
책꽂이에 꽂힌 열일곱 권의 편지가
부드러운 눈길로 나를 바라본다
어머니의 숨결이 들린다
어두운 밤 함께 길을 걷는다.
-<시인정신> 2011년 가을호-
출처 : 꿈꾸는 정원에서
글쓴이 : 희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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